죽은 엄마 찾기 9
누군가 죽음 앞에 서서 내게 전화한다면 나는 주저 않고 그에게 달려갈 것이다. 얼마나 사랑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을 두고 볼 자신이 없어서 그렇다. 어쩌면 이것은 상대방을 그다지 사랑하지 않아서 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죽겠다고 할 때 나를 말리고 이 세상에
잡아두는 모두가 밉고 싫다. 내가 붙잡아두는 그 누군가도 내가 밉고 싫을 것이다. 마음에 빚만
쌓일지도 모른다. 나는 정확하게 그 빚을 바란다. 내가 언제고 네게 달려갈 거라는 빚.친구들이 ‘힘들어할 때 제일 먼저 전화하게 되는 사람은 어째서인지 너’라고, 그런 고마운 말을 해주고는 한다. 친구들 말대로 나는 그 애들이 힘들면 십육 년된 주황색 차를 끌고 어디로든 갈 의향이 있고 기력이 있다.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체력도 기력도 없기로 유명한데, 눈앞이 깜빡거리는, 상향등 번쩍거리듯 아찔한 상황 앞에서는 없던 힘도 솟아나는 거 같다. 새벽 세 시에도 술에 취해도 아주 멀리 있어도 갈 수 있다. 차를 타고, 택시를 타고, 전동 킥보드를 타고, 자전거를 타고, 뛰어서, 걸어서, 어떻게든. 내가 좋은 사람이거나 의리가 있거나 인망이 두터워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애착을 형성하고 있는 상대가 힘들어하는 모습이 괴롭기 때문에, 사실은 그들의 ‘어떤 얼굴’을 마주치게 될까 봐 무섭기 때문에 나는 간다.
엎질러진 채로 울고 있는 친구들을 보는 일은 매번 힘에 겹다. 그런 식으로 울고 있는 사람들을 잘 알기 때문이고 그런 식으로 울지 못했던 여자를 하나 알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을 추한 모습으로 눈물과 콧물을 쥐어짜 내며 운다. 뭉개진 눈과 벌어진 입 사이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오고 비극이 이어진다. 그러나 나는 그 얼굴들을 보면 안도하게 된다. 그 얼굴들을 사랑한다. 친구들은 시간이 흐르고 나면 벌게진 눈을 하고 작은 목소리로 “이 제 괜찮아... 고마워...”라고 말할 것이다. 내가 무서워하는 것은 울지 않는 얼굴. 새파래진 채로 가만히 있는 얼굴. 시선의 끝에 캄캄한 어둠이 있는 얼굴이다.
어린 시절 읽었던 소설1에서, 주인공은 아무것도 없는 세계를 피해 도망간다. 세계의 끝으로, 無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전설에게로. 주인공이 사랑하던 세계는 점차 無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無는 형태도 없고 색깔도 없다. 눈으로 보면 시각을 잃은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현상이다. 주인공은 無에게 친구를 잃고 사랑하던 세계도 잃고 허망함에 압도된다. 내게 있어 그 이야기는 공포 그 자체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사랑하는 것들을 잃어가는 악몽을 몇 번이고 꾸었다. 다행히 소설은 無를 물리치고 다채로운 색상이 있는 세계를 돌려받지만. 나는 가끔 사람들의 얼굴을 보다가 그들이 가지고 있던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을 돌려받지 못할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결혼을 약속한 연인에게 바람맞은 친구의 얼굴이 그랬고 비좁은 원룸에서 번개탄을 피웠던 친구의 얼굴이 그랬고 열 살 무렵 보았던 엄마의 얼굴이 그랬다. “엄마랑 아빠랑 둘 중에 한 명이랑 살아야 한다면, 누구랑 살고 싶어?” 커다란 대형 마트에서 와플 한 박스를 담던 내게 다가온 엄마의 문장. 문장 뒤에 있던 엄마의 얼굴. 엄마의 얼굴은 포토샵의 지우개 툴로 문대버린 듯 희미하게 기억나지만 그 표정 속에 숨겨져 있던 위기만큼은 여전히 생생하다.
엄마, 엄마에 대해서 언제까지 말하게 될까? 전부 말하고 나면 전부 말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까? 아니면, 전부 말하지 않았다고 더 말해야 한다고 여전히 느끼고 있을까? 엄마에 대한 전부가 있을까? 엄마를 전부 알기는 할까? 그것보다 엄마, 나는 엄마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언젠가 나는 엄마로부터 달아나 엄마와 다른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 엄마가 죽던 겨울에 했던 맹세, 서른여섯 살이 되면 엄마처럼 자살해 엄마에게 복수하겠다는 그 맹세는 저주처럼 내 곁을 떠돈다. 나는 내가 정말 서른여섯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까 봐 무섭다. 그 죽음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재난이 파생될까도 무섭다.
* * *
자살 생존자라는 말은 자살에 실패하거나 자살 시도 후 생존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 아니다. 자살 생존자는 자살한 사람을 곁에 두었던 가족, 친구, 동료를 뜻한다. 여기서 생존자라는 말은 주변의 자살을 경험한 이들이 상실감을 넘어서는 극심한 트라우마를 겪는다는 의미에서 사용된다. 이 트라우마는 전쟁이나 대형 재난을 겪은 이들의 것처럼 무겁다. 죄책감과 분노, 버림받았다는 감정, 수치심, 사회적 낙인과 고립, 우울증의 발병 위험, 자살 고위험군 등. 이들은 시시각각 다양한 감정에 휩쓸리고 시달린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엄마가 죽고 난 뒤 나는 인생이 뒤집어졌다고 느꼈다. 끝없는 허무에 잠식되는 삶, 누군가를 또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우울한 사람들에게 갖게 되는 염오감, 동시에 벗어날 수 없는 나의 우울증 등. 그러나 그 거대한 ‘자살 생존자’라는 수식이 내가 겪은 일을 전부 설명할 수 있을까?
서른이 넘었는데도 문득 어린 여자아이였던 내가 안쓰러워 견딜 수 없는 때가 찾아온다. 엄마 없이 자란 여자아이가 겪게 되는 곤혹은 범위가 넓다. 샤워할 때 귀 뒤를 씻어야 한다는 것도, 양치할 때 혀를 닦아야 한다는 것도 생리대는 적어도 4시간에 한 번 갈아야 한다는 것도 누군가의 어깨너머로 배웠다. 자라는 내내 사람들의 행동을 모방하고 서툴게 따라했다. 친구들에게 먼저 사과하는 법도, 관계에서 사소하게 쌓인 오해를 푸는 법도 마찬가지였다. 뿐만 아니라 학원 선생님이 몸을 더듬는 행위를 보살핌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위험한 남자친구에게서 도망치는 법 등은 나이를 한참 먹고 어른이 되어서 알았다.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한다. 엄마가 여자아이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대한의 자산은 모욕과 관련된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모욕을 알아가는 일, 모욕을 감지하고 스스로를 지켜내는 일 같은 것 말이다. 나는 모든 나쁜 것들에서 나를 지키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그래서 자주 수치스러워졌다. 어린 시절의 내가 감지할 수 있던 유일한 모욕은 동정뿐이었다.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처음 마주했던 눈동자들. 딱하다는 눈빛들. 쟤는 엄마가 없어서 그래, 봐주자. 라는 무언의 약속들. 다정과 동정은 자음이 같다. 두 글자를 혼동하지 않기 위해 많은 애를 썼던 거 같다. 오래된 괴담에 나오는 거울 속의 도플갱어처럼 사람들의 표정을 따라 하고 학습했다. 칼을 꽂으면 튀어나오는 해적 장난감처럼 화내야 할 상황, 기뻐야 할 상황, 즉각적으로 반응해야 할 상황들을 연습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방어였다.
그리고 엄마는 내게 또 다른 유산을 남겼다. 나는 삶에 지친 얼굴들을 자주 알아본다. 삶의 가장자리에 몰려 천천히 부서지고 있는 사람들, 곧 죽어버릴 것만 같은 낯짝들. 그들이 짓는 미묘한 표정. 아니, 표정 없는 얼굴들. 어색하게 깜빡이는 두 눈과 뻣뻣하게 올라간 입꼬리 같은 것. 無의 얼굴. 내 핏줄 속에 흐르는 트라우마가 내게 신호를 보낸다. 저 사람 지금 핀치에 몰렸다고, 위험하다고. 그러면 나는 그 사람의 어깨를 부여잡고 너 이상하다고 말한다. 전화를 받고 벌떡 일어나 차키를 챙겨 나선다. 엑셀을 밟아 밤의 도로를 질주한다. 그들을 삶에 붙잡아 두어야 한다고 강박처럼 되뇐다. 아마도 이것은 나의 생존 투쟁일지도 모른다. 또다시 마음의 일부가 무너지는 일을 막고 싶어서, 재난을 피하고자 서둘러 움직이게 되는 걸지도 모른다.
가끔은, 이 모든 일에 염증이 날 때가 있다. 죽는 것이 그렇게 나쁜 일인가도 생각한다. 나도 죽고 싶기 때문이다. 사는 것은 줄 맞춰 잘 세워둔 도미노를 실수로 건드려서 와르르 무너지는 일과 비슷하다고 느낀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좋은 일과 들이닥치는 나쁜 일들. 가만히 길을 걷다가 버거워서 눈물이 날 때도 있다. 내가 정신병에 걸렸단 걸 인지하고 약을 먹고 있는데도 정신병에 걸렸단 걸 모르는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차라리 몰랐다면, 약을 안 먹었다면 죽어 없어졌을 수도 있으니까. 이건 내가 특별히 불행해서가 아닐 것이다. 그냥 다 이렇게 견디면서 사는 것일 텐데, 어떻게 삶에 붙어 있으라고 말할 수 있을까?
몇 해 전 여름에 새로운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나와 마찬가지로 자살한 사람을 가까이 뒀던 애였다. 나는 그 친구에게 슬며시 고백했다. 사실은 이런 생각까지 한 적이 있어. 차라리 이럴 거면 빨리 죽어라. 너도 편해지고 나도 편해지게. 근데 걔가 죽고 나니까 너무 고통스러워서 온몸을 칼로 질린 것 같았다고. 너만 편해지고 나는 절대 편해질 수 없었다고. 그러니까 나는, 시간을 돌리고 싶다. 시간을 돌려서 죽은 친구들을 살려내고 싶다. 더 과거로 달려가 엄마를 살려내고 싶다. 엄마의 손을 붙잡고 엄마가 없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너희들이 죽은 뒤에 내 삶에 펼쳐질 수많은 수치와 모욕을 건네면서 이런 빚을 내게 질 거냐고 묻고 싶다. 그렇게라도 이 지난한 삶에 붙어 있으라고 적어도 손을 놓지는 않겠다고 말하고 싶다. 그럴 끈기와 힘이 내게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보겠다고… 그 말에 대한 책임도 못 지면서 말이다.
그래도
“계속 같이 있자. 아무리 괴로워도, 니가 나를 못 견뎌도, 너는 나를 못 견뎌도, 같이 있자.”2 책장을 넘기면서 이 문장을 마주했을 때. 나는 가장 죽고 싶은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즈음 친구들은 내가 죽을까 봐 순번을 지켜가며 보초를 섰다. 양화대교에 올랐을 때, 친구들은 택시를 타고 달려왔다. 어쩌면 이것은 사랑이나 의리와 거리가 멀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그래도 우리 같이 있자. 나를 이 징그러운 삶에 묶어두는 대가로 너희도 이 수치스러운 삶에 묶여 있자. 그렇게 늙어 죽자. 연대라는 이름의 인질극에 파묻히자.
서른한 살하고 2개월이 지난 이 시점에서. 서른여섯에 자살할 거라는 결심은 유령처럼 내 방 구석에서 나를 마주 보고 있다. 그리고 방의 바깥에는 서른일곱을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엄마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복수는 이 모욕과 수치를 이고 지고 서른일곱을 맞이하는 걸지도 모른다. 엄마가 맛보지 못한 삶의 다른 부분을 폭식하는 것, 그것이 내가 간절히 바라는 바다. 그렇기에 계속 쓴다. 엄마의 죽음을 웃도는 이야기들을. 다가설 수 없고 찾을 수 없는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1. 미하엘 엔데 — 끝없는 이야기 (비룡소)
2. 지영 — 지영 (주로출판사)
죽은 엄마 찾기 9
어떤 죽음은 끝나지 않는다. 남겨진 사람의 몸속에서, 기억 속에서, 관계 속에서 다른 형태로 계속 살아 있다.
곽예인은 엄마를 잃은 이후의 시간을 더듬는다. 삶의 가장자리에 선 사람들의 얼굴을 유난히 잘 알아보게 되었고, 위태로운 친구들의 전화를 받으면 한밤중에도 달려가게 되었다. 죽음을 달고 사는 사람들을 붙잡아 두려는 집착은 사랑 때문일까, 아니면 또 다른 상실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일까.
곽예인은 엄마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질문을 친구들, 연인들, 자기 자신에게로 돌린다. 찾을 수 없는 엄마를 계속 찾아 나서는 일. 그리고 엄마의 죽음을 넘어서는 이야기들을 계속 써 내려가는 일. ‹죽은 엄마 찾기 9›는 곽예인의 고집스러운 기록이자, 애도이자, 엄마에 대한 최고의 복수다.
일시: 2026.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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