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사랑이 넘치는, 새 세상

도시 곳곳에서, 웹에서, 사람들이 아는 사이 모르는 사이에 일들이 벌어졌다. 난잡하게 난장에서 일견 줏대 없이 이런저런 말과 몸짓이 시작되는가 하면 또 끝이 났다. 나는 이 모든 일들의 마지막을 기리며, 산만하게 그 궤적을 좇고 또 산만하게 정리해 보려 한다. 그 도정에 도움을 준 죽은 사람과 또 다른 죽은 사람들과, 산 사람들의 글을 잇고 덧대면서.

나비처럼 La Papillonne

이건 미친 짓이다. 그의 작업은 그를 지겹게 하고, 위협하고, 곤경에 처하게 한다. 그럴 때마다 이 자가 기분 전환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고작 이거라니, 그것도 시골에서(시골에서까지 와서 자기가 쓴 것을 다시 읽고 있으니 말이다). 작업하면서 내가 5분마다 가만히 못 있고 하게 되는 것들의 목록. 파리 살충제 뿌리기. 손톱 자르기. 자두 하나 먹기. 오줌 싸러 가기. 수돗물에서 아직도 흙물이 나오는지 확인하기(오늘도 수도가 고장 났다.) 약국에 가기. 나무 위에 자두 열매가 몇 개나 익었는지 보러 가기. 신문 보기. 내 종이 뭉치들을 고정할 장치를 만지작거리기, 기타 등등. 그러니까, 나는 드래그하고je drague 있는 것이다.
 
(이 드래그는 푸리에가 변이, 대안, 나비 짓이라 명명했던 것과 같은 열정의 사안이다.)1

(1)    롤랑 바르트(류재화 옮김),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21세기북스, 2025), 120-1.
자기 자신을 ‘그’라고 지칭하거나, 이름—자주 R.B. 라는 이니셜—으로 부르기를 즐겨했던 바르트는, 자기가 쓴 글을 다시 보고 고치는 동안, ADHD 마냥 잠시도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이것저것 주변을 건드리고 돌아다니는 중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보고 있는 당신도 동일하게 처해 있는 이 상황.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고 정신을 분산시키며 어디에도 안착하는 법 없이 미끄러지는 모양새. 번역자가 길게 풀어 놓은 것처럼, 이 모든 상황은 ‘드래그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중의적인 문장에 함축된다.2



(2)    같은 곳, “[역자주] 한 단어로 옮길 수 없을 만큼 다중적 의미가 있다. 바르트는 이 다중적 의미를 모두 중첩하여 쓰고 있으므로 그대로 음독했다. 특히나 요즘 흔히 쓰는 외래어 표현이어서 그대로 살렸다. draguer의 첫 번째 뜻은 ‘쓰레그물로 조개를 잡다’이다. 강을 준설할 때도 여러 도구를 이리저리 휘저으며 강의 흙을 쓸어 모은다. 요즘 자주 쓰는 마우스를 드래그하는 손동작도 여기서 기인한다.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누군가를 유혹하거나, 나비처럼 이 꽃 저 꽃 옮겨 다니는 동작 때문에 누군가를 꾄다는 뜻으로도 파생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단락의 시작으로 돌아가 ‘나비처럼’에 닿는다. 

La Papillonne 나비-짓

19세기의 사상가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 1772-1837)가 인간 본성의 영역으로 규정한 ‘열정’의 한 국면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푸리에는 팔랑팔랑 날갯짓을 하며 옮겨 다니는 나비의 모습을 은유로, 관심과 집중을 계속 바꾸고 변덕을 부리는 인간 성정을 들여다봤다. 이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던지, 그는 ‘팔랑주(phalange: 이상적 노동 공동체)’, ‘팔랑스테르(Phanlanstère: 팔랑주의 공동주택)’라 명명한 일종의 유토피아 모델—실제로 유럽, 미국 등지에서 이 공동체 건물이 조성된 적이 있다—에서 노동자들이 2시간 이상 동일 업무를 하지 않도록 했다. (아, ADHD들을 위한 세상이라니…!)

공상 ➞ 상상

샤를 푸리에는 ‘공상적 사회주의자(Utopian Socialism)’로 분류된다. 공상적 사회주의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비판적으로 계승했다 알려진,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여 그와 다른 노동과 사회 구성을 제안하는 사회주의적 사유의 원류를 말한다. 그런데 ‘공상적’이라는 말이 시사하듯, 이들 사유는 사회를 다만 “소망과 회한”의 수준에서 다룰 뿐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과학적’ 사회주의자들이 현재의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의 신비를 폭로하고 도래할 세계의 필연성을 정식화한다면, 푸리에주의자들을 비롯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은 빈약한 논리로 열등함을 드러내고 터무니없이 공염불을 왼다 여겨졌다.3

(3) 하명진, 「샤를 푸리에의 유토피아」, 『현대사상』 제5호(2009); 박주원, 「푸리에에서 맑스로? 맑스에서 푸리에로: ‘팔랑주(phalange)’, 즐거운 노동공동체의 가능성과 한계」, 『한국정치학회보』 제37집 제2호(2003).

‘공상’이라는 한자어가 좀 더 가혹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긴 하나, 영문에서 사회주의를 수식하고 있는 ‘유토피아주의’ 역시 전망이 밝진 않다. 유토피아란 결국 ‘없는 곳’에 대한 상상이니 말이다. 그렇다, 공상. 상상. 이러한 단어는 아무래도 힘이 없게 느껴진다. 세상을 바꾸어 보자 하는데, 앉은 자리에서 상상에 호소할 뿐이라니. 

그런데 우리의 푸리에는 현실(문명)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그 상황으로부터 완전한 전복 가능성을 도출한다. 푸리에가 자신의 방법론으로 천명한 “절대적 회의”와 “절대적 편차”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그는 공상/상상의 불가능과 무력감을 새로운 사상의 전방에 돌려세운다. 실제로 자주 미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했던, 아카데미와 거리가 먼 주경야독의 사상가는 자신이 기존의 철학자들과 달리, 밥벌이 수단으로 학문하는 것도 아니고, 눈치 볼 만하게 관계 맺은 학파에 속한 것도 아니기에 기존의 학문들과 절대적인 편차를 가지고 절대적인 회의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데카르트식 ‘방법론적 회의’는 반 푼어치라며, 자신의 방법론은 “확실히 쓸모없고” 또 “아주 위험한” 학문을 열 것이라고 보았다.4


(4)    샤를 푸리에 (변기찬 옮김), 「네 가지 운동과 일반적 운명에 대한 이론」(1808년판 서문),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 외』(책세상, 2007), 25-9.

그에겐 이성이 아니라,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푸리에가 그처럼 청개구리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게 된 데에는 당대 혁명과 문명의 실패에 이유가 있었다. 1789년의 대혁명 이후 빠르게 복고된 왕정, 잇따라 좌절하는 봉기들을 보면서 푸리에는 기성 철학이 잘못된 이유가 인간 ‘열정’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대신, 그는 사회 문제를 해석하고 변혁하는 중심에 사랑·감정·열정이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인간 본성으로서의 열정을 12개—5개 감각적 열정(오감), 4개 정서적 열정(우애, 사랑, 부모애, 야망), 3개 분배적 열정—로 분류했다. 푸리에가 보기에 인간은 이러한 열정을 쾌의 방향으로 추구하려는 기본적인 목적을 갖는다. 그런데 각각의 열정들이 완전히 개별적이거나 서로 배타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까닭에, 쾌락 추구의 목적 역시 단편적인 수준에서는 이뤄지기가 어렵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이하지만 인접한 열정들이 조화와 부조화 속에 결합하고 배분되는 계열체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나비-짓.

이에 푸리에는 개별 열정들이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드러내며 3개의 ‘분배적 열정’을 강조하게 됐다. 각각은 “변덕열정(la Papillonne)”, “밀모열정(la Cabaliste)”, “복합열정(la Composite)”으로, 그중 첫 번째 분배적 열정인 “변덕열정”이 바로 앞서 “나비-짓”이라 언급한 그것이다. 이는 감각과 감정이 주기적으로 변하고 대조되도록 자극되는 것에 대한 욕구로, 어느 한 감각/정서를 좇는가 하면 금세 다른 것을 찾게 되는 변덕을 그 자체 열정의 관계적 상태라고 본 것이다. 두 번째 “밀모열정”은 모의 · 작당 · 경쟁을 일으키는 욕구로, 질투와 정쟁 등의 특징을 보이며, 음모론에 대한 취향도 주요하게 다뤄진다. 셋째로, “복합열정”은 정신적인 것과 육체/물질적인 것, 감각과 영혼처럼 상이한 쾌락이 동시에 결합하며 생기는 열정이다.5

(5)     다음의 논문을 참고. 박주원, 「19세기 유토피아 사상의 정치철학적 토대 - 푸리에(C. Fourier) 사상에서 열정, 열정의 계열, 열정인력법칙의 개념적 연구」, 『시민과사회 NGO』 Vol.11, no.2 (2013).

이 세 가지 분배적 열정은 개별 열정들의 사회적 (불)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꽤 재밌는 고찰이 드러난다. 그러니까 자극을 욕망하는 개인은, 동일한 이유로 공동체를 만들려 하기도 하고, 공동체는 선한 의지의 총합이기보다 서로 다른 욕망의 질투나 음모 등에서 형성되며, 모임들은 이미 둘 이상의 서로 다른 목적(열정)이 겹쳐진 결과이며, 개인과 집단은 한쪽 방향에서의 맹목적인 경쟁에만 몰두하기보다 다른 방향에서 추동된 개인 및 집단에 결합하고 또 그로부터 분할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푸리에에게 열정은 개인을 구성하는 근본 단위이지만, 동시에 늘 상대적이고 관계적이라는 의미에서 사회적인 것이다.

위와 같은 고찰은 자연스레 합의에 도달하는 평온한 사회를 일찍이 포기한다. 대신,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고, 각각이 합리적이지 않은 만큼 사회엔 늘 부조화와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라는 점을 확인시킨다. 그리고 푸리에는 이러한 부조화를 탓하고 나무라기보다, 그 안에서 각자가 자연스럽게 쾌를 추구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이상적인 사회 조직/구성을 상상했다.

그러니까,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 Le Nouveau Monde Amoureux.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는 푸리에가 새로운 조화의 세계를 건설하려는 목적 하에 쓴 다른 텍스트들과 마찬가지 의식을 공유한다. 선결 과제는 문명의 질서에 대한 절대적 비판이며, 이 텍스트에 상정된 폐기 대상으로서의 구 질서는 일처일부 결혼 제도다. 그러나 결혼 비판이 전부는 당연 아니다. 푸리에는 인간 욕망과 쾌락 추구를 억압하는 문명의 폐단을 밝히며, 그것이 전복된 후 펼쳐질 완벽한 다자간 열정의 관계, 순수한 사랑—감정적, 육체적, 온갖 기벽의 사랑—이 구현되는 조화의 단계를 그리고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푸리에는 남자 1과 여자 1의 사례를 든다. 설득력을 확보하기 위해(?) 푸리에는 이 둘을 나르키소스와 프시케라는 신화적 인물로 가정한다. 자,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이 모든 면에서 매력을 가진 남자 1과 여자 1이 있다. 이들은 누가 봐도 매력적이므로, 각각에게 육체적이고도 감정적이며 관념적이기도 한 애정을 호소하는 여/남이 20명씩은 있다고 가정된다. 일단 여기서는 헤테로 섹슈얼 관계만 상정한다. 남자 1은 20명 중 한 명과 연애를 생각해 볼 수 있고, 여자 1도 역시 20명 중 한 명과 연애를 고려한다. 이때, 남자 1과 어떤 여자, 여자 1과 어떤 남자가 연애관계에 돌입한다고 하자. 이런 전개는 소위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우리가 항상 보고 또 보기를 기대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배타적 연애 관계를 설정하는 이 같은 전개는 푸리에의 언어로 ‘문명적’ 모델을 따르는 것인데, 문제는 이 모델이 사랑에 관한 인간 ‘본성’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푸리에는 이러한 무시로 인해 ‘그 이후’(일대일 짝짓기 이후) 일어나는 연애 사건들(약속된 관계를 벗어난 관심, 질투, 이어지는 파국들….)이 다 비-자연화하게 되고, 결국 ‘사랑의 행위들’이 (사랑의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편협하고 비열한 일들로 낙인 찍힌다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기존의 문명 내에서 관계는 “단조로운 것”, 끊임없는 “이기주의, 계략, 간통이 지배하는 두 가지 유형에 국한된 연애”, “문명의 해로운 특성인 외설에 대한 법적 규제”로만 드러날 뿐이다. 문명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간통, 간통을 저지른 파트너를 가진 남편/아내의 신세, 은밀한 만남을 통해 비교 우위를 점한 자의 만족감 등이 성립되는 것은 그 자체가 “독점적인 소유에 대한 강박관념”에 기인한 “매우 불안정한 환상”이 작용한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환상은 실제로 각각의 자유를 제한할 뿐 아니라 사회의 운영과 발전에 있어서도 실상 불필요하다고 푸리에는 역설한다. 그러면서 “사랑에 신성한 열정이라는 이름을 전적으로 부여[하지만] 우리를 신과 한층 더 분명하게 동일시하게 하고, 신의 본질에 참여하게 하는 그 열정이 우리를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편파성으로 몰고 가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라고 묻는다.6


(6)    샤를 푸리에(변기찬 옮김), 「제2장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 앞의 책, 96-7.

이제, 푸리에는 앞서 불러 놓은 남자 1과 여자 1, 나르키소스와 프시케가 사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훌륭한 커플은 자신들을 원하는 40명과 자유로운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40명 (+2명) 각자는 자기 욕망을 충족시킬 쾌를 추구하면서, 배타적인 관계가 설정됨에 따라 빚어진 무자비한 질투 대신, 충돌과 갈등을 취하는 동시에 이를 다른 방식으로 ‘분배하는’ 열정을 따른다. 심지어 푸리에는 사랑에 빠진 대상이 사실 다른 이(들)에게도 육체적으로 소유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역으로 순수한 감정과 순수한 사랑이 증명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육체적인 관계와 관념 및 순수 등을 대립관계에 두지 않는다.) 

주의할 것은 여기서 그가 주장하는 다자적 관계가, 인류 문명사에서 자주 발견되는 폴리가미(Polygamie)—일부다처 혹은 다부일처와 같은 불균형한 혼인 체제—가 아니라, 모두가 모두와 관계 맺는 복합적 옴니가미(Omnigamie)로 상상된다는 점이다. 

10만 명의 개인이 나머지 99,999명과 관계를 맺고 있는 옴니가미 사회.

상상의 속도를 늦춰선 안 된다. 푸리에는 만약 사회에 10만 명이 있다고 하면, 10만 명 각자가 나머지 99,999명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반대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과 맺어지는 문명의 논리에 의하면, 둘(은 커플이 되었다)을 제외한 나머지 99,998명의 쾌가 고려되지 않는다. 그래서 기존의 이기주의적 문명의 메커니즘에서는 결과적으로 개인이 ‘모두’와 대립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에서는 10만 명이 10만 명과 관계하며 조화 속에 놓인다.

수용 – 나비처럼

푸리에 텍스트의 운명은 마치 나비와 같았다. 창궐하기보다는 흩어졌고, 전체로 이해되기보다 파편으로 받아들여졌다. 오해와 굴절을 안은 채로.

우선, 여성의 위상을 다뤄 온 서유럽 사상사에서 “Le Nouveau Monde Amoureux”를 살펴보자. 『서양 여성사 Histoire des femmes en Occident』(1991/2002) 제4권 19세기 편의 저자들은 현대적 개인을 보호하는 것으로서 사회의 계약적 조건을 검토하기 시작한 당대 계몽 철학을 정리하며, 푸리에를 ‘남성의 권리로부터 출발하기’를 거부한 예외적 사회철학자로 소개한다. 푸리에는 남성 권리의 이면에서 모든 ‘일’이 명백하게 특권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던 점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또, 책은 푸리에가 결혼의 이미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지점—「사랑이 넘치는 신세계」의 핵심이다—에 문명 사회에서 여성의 종속과 실추에 관한 문제가 농축되어 있다고 정리한다. 그리고 푸리에의 유토피아 개념이 특히 여성 개인의 자유에 달려 있었다고 입을 모은다.7
(7)     Geneviève Fraisse, Michelle Perrot (ed.), Histoire des femmes en Occident – Le XIXe siècke (Plon: 1991/2002), 70-71.
때는 1950년대 후반, 1960년대 초. 초현실주의자들도 푸리에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1964년에서 68년 무렵, 유럽은 민주주의, 공화주의, 민족주의에 관한 인식과 더불어, 특히 섹슈얼리티 실천에 관해 심대한 인식적 변화를 겪었다. 이차대전 이후 정부들은 가족의 가치를 소비주의와 더불어 장려했고, 각종 미디어는 로맨틱 관계를 강조하며 결혼으로 맺는 사랑의 서사, 특히 섹스에 긍정적인 인식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여성의 혼전 섹스에 관한 대중적 인식이 엄청나게 변했으며, 섹스를 즐기는 일이 일종의 새로운 정상성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여성 개인의 자유가, 성의 자유가 바야흐로 도래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디로 가고 있었는가?

↳ 푸리에(?): 문명을 절대적으로 회의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푸리에가 사회주의자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국내에 유일하게 번역 · 출판된 푸리에 텍스트가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라는 점은 흥미롭고 이상하다. 2007년 책세상문고 시리즈로 출간된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 외』에는 「네 가지 운동과 일반적 운명에 대한 이론」 서문과,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의 서문 격인 초반부가 실렸다. 저자는 책의 제2장에 할애한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를 중심으로 푸리에 사상을 소개하는데, 총 12권에 이르는 전집 중 대체 왜 이 책인가 하는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Le Nouveau Monde Amoureux”가 푸리에 후기 작이며 생전 발표된 적 없다가 사후 130년(원고 집필 후 150년) 뒤에 발간된 원고라는 점은, 해외 사상의 ‘수입’ 역할을 하기 마련인 번역 작업에서 어떻게 고려되었을지 궁금해진다.8

(8)    샤를 푸리에는 1772년생으로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살다가 그것이 채 완수되지 못한 1837년에 죽었다. “Le Nouveau Monde Amoureux”는 1816년 무렵 쓰인 것으로 전하며, 그 원고가 뒤늦게 아카이브에서 발굴되어 1967년에 발간되었다.

그렇다면, 왜 한국에서는 다른 무엇도 아닌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가 번역된 것일까? 세상 다른 일들의 이치가 그렇듯, 어떤 텍스트가 선별·번역되는 것도 그저 그걸 하려는 자의 기이한 취미와 ‘어쩌다’ 식의 우연이 겹쳤을 뿐일까? 그보다 나는 역자의 말에서 어떤 역전된 욕망을 발견한다. 

역자 변기찬은 푸리에 사상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번역본 출간과 비슷한 시기 발표한 몇 개 논문을 통해서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에 주석 달기를 지속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수상쩍은 문장을 자주 사용했는데, 가령, 그는 책세상문고 역자 서문에서부터 이렇게 운을 뗀다. “푸리에가 제시한 성적 욕망의 해방은 단순히 선구적인 페미니스트의 주장이 아니다.” “특히 성과 관련된 문제는 여성 해방을 주장하는 측은 물론 그 주장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측에게도 미묘하지만 언제나 언급할 수밖에 없는 문제다.”9 또 다른 논문에서는 결론을 이렇게 맺는다. “결국 푸리에가 언급한 여성의 해방은 그가 문명을 비판하고 조화를 이룬 세계를 건설하려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는 볼 수 없다.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도 자유롭게 노동을 선택하는 것처럼 성적인 파트너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구체적인 여성해방론적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 아니다. 단지 억압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억압 역시 존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10

(9)        변기찬, 「들어가는 말」, 앞의 책, 14.
(10)    변기찬, 「푸리에의 팔랑스테르(Phalanstère)와 여성의 성적 해방」, 『프랑스사연구』 no.5(2001), 174-5

여성 이전의 인간. 성적 해방 이전의 노동 해방. 문명 비판을 위한 과정으로서의 섹슈얼리티 비판. 역자는 중요한 것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을 상정하려 한다. 정작 스스로의 욕망이 어디로 새 나가고 있는지는 단속하지 못한 채로. 푸리에가 말한 ‘절대적 회의’와 ‘절대적 편차’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모르는 채로.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의 문장에는 (죽은 자의 말없는) 빈 칸이 많다.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 텍스트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친구 시몬 드부(Simone Debout)가 프랑스 국립문서보관소(아카이브)에서 미발표 원고를 발견해 엮어 내면서 푸리에 전집 제7권에 뒤늦게 수록되었다. 지금도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는 시몬 드부가 편집을 맡은 1966-68년 무렵의 판본을 바탕으로 발행된다.11
(11)     les presses du réel 출판사 페이지를 참고한다.: https://www.lespressesdureel.com/ouvrage.php?id=634&menu=0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은 시몬 드부를 통해 샤를 푸리에를 알게 된 것으로 전한다. 모더니즘 운동으로서 초현실주의가 어떻게 국제적인 네트워크 속에서 정치적 역량을 펼쳤는지 살핀 비교적 신간 『래디컬 드림즈 Radical Dreams』(2022)에 그 연관이 언급된다. 책의 한 챕터에서, 블랜튼 뮤지엄의 어시스턴트 큐레이터였던 클레어 하워드(Claire Howard)는 푸리에 사상과 초현실주의의 연관을 검토한다.12 그는 특히 초현실주의 에로티시즘의 구상이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 무렵 형성되었으며, 이것이 시몬 드부에 의해 푸리에의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 원고가 발견되던 때와 겹친다고 보았다.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이 시기 이전에 브르통이 푸리에를 언급한 경우는 없으며, 그가 시몬 드부와 작업하게 된 이후에 푸리에 사상을 알게 된 것이고, 이후 초현실주의 전시에 그 개념이 적극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12    Claire Howard, “Passionate Attraction” in Radical Dreams, edited by Elliott H. King and Abigail Susik (Penn State University Press, 2022), 76-91.
드부는 이르면 1959년에는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의 존재를 초현실주의자에게 전달했을 것으로 보인다.13 같은 해 열린 EROS(Exposition inteRnatiOnale du Surréalisme) 전시에서 드부가 쓴 서문에는 이미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에 속해 있는 짧은 절에서 ‘향연의 뮤지엄(the museum orgy)’ 개념이 인용된다.14 
(13)     같은 책, 84.
(14)     Charles Fourier, «De l’orgie de musée ou omnigamie mixte en ordre composé et harmonique», Théorie des quatre mouvements et des distinées générales, suivi du Nouveau monde amoureux. Collection L'écart absolu dirigée par Michel Giroud (Les presses du réel, 1998), 95-100.

조화 속에서 항연을 전시하기

향연의 뮤지엄에서는 소유의 개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관조의 대상으로서 ‘누드’ 신체가 전시된다. 전제는, 팔랑주 노동 공동체, 푸리에의 유토피아, 즉 조화 안에서 성원들이 미적인 인간들이라는 것이다. 그는 공동체 사람들이 실제로 작품—회화와 조각이라고 특정되어 있음—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온전히 예술에 헌신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 전제한다. 그러면서 그는 “향연은 우리를 분열시키는 이해관계의 경쟁에서 벗어난 사회에서는 쉽게 조직될 수 있으며, 문명인 대다수에게는 대체로 낯선 미술에 친숙한 그 사회에서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고 덧붙인다.15
(15)     같은 책, 96.
‘향연’을 전시하기의 구체적 양상은 실제로 에로틱한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누드, 각종 음란 행위, 체위 등을 다수로 드러낸다. 푸리에는 책 한 권은 족히 쓰도록 다양한 기벽이 있다며 몇 가지 사례를 드는데, 예수 수난보다 더한 채찍질을 애무로 즐기는 남자나, 어린이용 모자를 쓰고 어린아이처럼 체벌 받는 노인, 15분 동안 발뒤꿈치만 긁힘 받는 여인 등이 그 경우다.

발가벗은 몸, 동의를 구하지 않고도 연결되는 기벽들. 항연의 뮤지엄이 매개하는, 사랑이 넘치는 새로운 세계에선, “여러 인종의 아름다움, 예의와 풍요로움, 자유, 진실, 보편적 친절함 등이 모든 계급의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게” 되며, “고결하고 충성스러운 유형 속에서 그런 사랑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변화시키기 위해 세련됨과 경쟁”하게 된다.16 모두가 모두를 향해 관계를 맺고 있는 사회에서, 시선은 자기 폐쇄적 회로를 벗어나고, 미적 경험의 섹슈얼한 상호 교환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16)     같은 책, 102.

빈곤한 사람이 전혀 없고 모든 사람이 나이가 아주 많이 들어서까지도 사랑을 누릴 수 있는 조화 속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루 일과 중 일정 부분을 열정에 바친다. 그래서 사랑은 조화 속에서 핵심적인 활동이 된다. 사랑은 나름의 규범, 법원, 궁정, 체제 등을 갖고 있다.17

(17)    샤를 푸리에 (변기찬 옮김), 앞의 책, 119.
약속된 적 없고 구속된 적 없는 채로, 모두가 모두를 향한 발신인이자 수신인이 되는 형식이 열리고 또 닫힌다.

오늘에 ‘향연의 뮤지엄’은 여전한 불가능 속에 성행 중이다. 지난 석 달 동안 표류를 자처하는 전시가 곳곳에서 열렸다. 내가 보거나 보지 못한 현장에서 웅얼거리는 말과 글이 쏟아졌고, 광장과 나만의 방을 오가거나 혹은 화이트큐브와 클럽을 오고 가며, 더러는 길바닥과 차고에서, 어느 전봇대 위에서 일들을 벌렸다. 전전하고 긍긍하는 이미지들이 저마다의 벗은 몸과 마음을 드러냈다. 

이것들이 기존의 질서와 불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들 조금씩 눈치를 채고 있었다. 연루가 두려워지는 이상한 제안이 거기에 스며들어 있다는 점 역시도 알아채고 있었다. 10만 명의 개인이 나머지 99,999명과 관계를 맺길 상상하는 옴니가미 사회, 푸리에가 가려던 곳은 “진실의 절대적 영향력, 다정한 관계들의 확장”을 내다보게 하는 데에 있다. 우정은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의 다른 이름이다. 

문명 내에서 사람들은 적은 수의 제한된 친구에게만 우정을 갖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반면, 조화는 각각의 사람들에게 두려워할 배신 행위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우호 관계를 한없이 증대시키도록 돕는다. 조화의 실질적인 질서는 가족 관계에도 마찬가지로 작용한다. 배타적 결혼은 가족 관계를 가장 제한적인 관계로 국한하는 반면, 조화 속에서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그 관계가 확장된다.18
나는 그 확장을 좇아 말을 덧댄다.
나의 동료들에게.



 (18)    같은 책, 103-4.















허호정 HUR Hojeong


그러니까, 사랑이 넘치는, 새 세상

허호정의 ‹그러니까, 사랑이 넘치는, 새 세상›은 샤를 푸리에의 『Le Nouveau Monde Amoureux』(1816)에서 출발한 에세이다.

“지난 석 달 동안 표류를 자처하는 전시가 곳곳에서 열렸다. 내가 보거나 보지 못한 현장에서 웅얼거리는 말과 글이 쏟아졌고, 광장과 나만의 방을 오가거나 혹은 화이트큐브와 클럽을 오고 가며, 더러는 길바닥과 차고에서, 어느 전봇대 위에서 일들을 벌렸다. 전전하고 긍긍하는 이미지들이 저마다의 벗은 몸과 마음을 드러냈다.” — 글 발췌

허호정은 이성이 아니라 열정으로 ‘없는 곳’에 대한 상상을 ‘나비-짓’ 한다. 팔랑팔랑 날갯짓하며 옮겨 다니는 나비의 모습을 은유로, 관심과 집중을 계속 바꾸고 변덕을 부리는 인간의 성정을 들여다본 푸리에를 따라, 그 사유를 전유하고 확장하며 말을 덧댄다.

일시: 2026. 6. 27.
장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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