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계절을 두 번 쓰기 (2)
이심지


1.

조울증을 가진 애인과 함께 하는 경험에 대해 글을 쓰게 되었다며 혜원이 나의 동의를 구하면서 같이 글을 쓸 것을 제안했을 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이런 경험은 낯설었다. 혜원을 만나기 전에는 주로 내가 글에 타인을 등장시켜 왔지, 남의 글에 내가 등장하는 경우는 그만큼 많지 않았다. 혜원을 만나기 이전에는 내가 보통 사진을 찍히기보다 찍는 위치에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혜원을 만나고서는 피사체가 되는 일이 많기도 했다. 그 역시 비슷하게 낯선 경험이었다.







이래저래 나의 애인이 작가임을 어떤 때보다 강하게 체감하게 되었다. 혜원을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부터 나중에 같이 뭔가를 써 보자고 했었는데 그 미래가 생각보다 일찍 왔다고도 할 수 있었다. 삽화 때 내가 혜원을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는 내가 제일 잘 알아서 혜원의 글에서 내가 어떻게 묘사될지 솔직히 걱정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혜원이 그런 글을 쓰기로 한 순간 뭔가가 이제 내 손을 떠났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나에 대해 어떻게 쓰든 혜원을 제지하고 싶지 않았다. 말하자면, 나는 나에 대해 서술할 권리를 독점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이 ‘함께 쓰기’의 작업은 어떤 면에서 그 시간을 함께 보낸 우리가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나’의 명예(?)에 대한 우려를 이 ‘함께 쓰기’라는 방법을 통해서 불식시킬 수 있었던 것일까? 완전히 그렇지는 않겠지만 시도해 봄직하다고 생각했다. 근본적으로는 나에 대한 서술권을 나눠 가질 혜원에 대한 믿음이 있었을 것이고, 약간은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의 모드가 되었다. 한 겹의 글을 덧붙임으로써 나는 나를 변호하고 싶었던 것일까? 혜원의 글에 사소한 사실 관계 오류가 있을 경우 그것을 정정하고 싶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아예 반대로,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굳건한 우리의 관계에 대해 자랑 비슷한 걸 하고 싶은 것이었을까?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이중의 곤란을 느낀다. 첫 번째는 서술하였듯이 혜원의 글에 등장할 주인공으로서의 곤란이고, 두 번째는 혜원을 포함한 타인에 대해 쓰는 사람으로서의 곤란이다. 이것이 둘 모두의 경험인 한 별로 그이의 글을 검열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그럼에도 너무 내가 못나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자연스레 충돌한다. 그리고 이게 온전히 우리 둘만의 이야기일 수 없다는 점 역시도 나를 벌벌 떨게 한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나 역시도 얼마든지 ‘정면돌파’를 피하고 상대적으로 무해하고 안전한 지대에 머물러 있기를 선택할 수 있(었)다. ‘하필 나의 삶에 연루된 바람에’ 내 글 속에 불투명하게라도 박제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아니면 나의 평화와 안전(혹은 안정)을 위해서? 나는 독립출판으로 산문집을 내면서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주는 편지와도 같은 글들”이라 표현한 적이 있는데, 사실 내가 그렇게나 사랑했던 사람들이 읽기에 기꺼운 글들이었을지 되묻는다면 그다지 자신이 없다. 그 글들이 특별히 못나서가 아니라, 인연이 다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쓴 글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과의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박제하는 것이 아니라도, 나는 마치 투명한 이름표가 붙은 것 같은 글들을 쓰며 살았다.


우리가 더 이상 인사하지 않는 사이라면, ‘나’가 ‘너’와 주고받은 것들을 (은밀히라도) 소재 삼는 것은 그 자체로 곧 너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일일까? 트위터를 하다 보면 “글 쓰는 일이 뭐 대단하다고 현실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냐, 그런 글은 안 쓰면 그만”이라는 식의 주장들을 정말 많이 보게 된다. 나는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럼에도 써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게 뭘지에 대해 생각해왔다. 베스트셀러 작가도 아닌데, 익명의 누군가들에게 뭇매를 맞는 광경까지 상상해가면서 말이다.

어쩌면 글 쓰는 일이 대단히 대단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다지 대단치 않기 때문에 몇 자 써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글쓰는 사람으로서 검열이 많아지는 것은 한편으로는 가져야 마땅한 조심스러움에서 기인한다 할지라도 혹여 글쓰기에 너무 큰 위상을 부여하는 일은 아닌가? 어떤 경험을 스스로 소화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내가 글쓰기를 채택하는 것은 너무 이기적인 일인가? 그 글을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 게시하는 것은 그저 ‘노출증’에서 기인한 것인가?




에세이나 ‘자전 소설’의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글들 중에 등장 인물들의 동의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혹은 익명화와 각색의 과정을 충분히 거쳤음에도 주변인들에게는 식별이 가능한 정도라는 이유로 불태워져야 마땅한 글들이 하나씩 호출된다면 나의 글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과거에 대해 이야기할 때 누구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두루뭉술하게 서술한다 하더라도 내가 글을 계속 쓴다는 사실 그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을까? 혹은 등장 인물과 ‘나’가 현실 속에서 사이가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다면 괜찮을 수도 있는 문제인 걸까? 그렇다면 추후에 사이가 나빠지는 경우 또 문제가 달라지는 걸까? 혹은 등장 인물이 나의 글을 읽지 않기로, 또는 문제 삼지 않기로 선택하면 괜찮은 걸까? 이는 결국 ‘운’의 문제로 귀착되는 걸까? 만일 그게 정말 운에 불과하다면, 나는 왜 계속 뭔가를 쓰면서도 주저하게 되는 것일까?

*

정확한 환대의 실험? 별로 맘에 안들지만 일단 그렇게 명명해보도록 하자. 살면서 누군가를 만날 수 없는 대부분 하찮고 때로는 복잡한, 여하튼 여기에 쉬이 서술하기는 어려운 이유들을 너무 일찍, 많이 적립해왔다. 그리하여 어떤 공간에 내가 가도 되는지 혼자 자기 검열은 엄청나게 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척 이곳저곳을 드나들었다. 그곳에 내가 들어야 하는 이야기들, 봐야 하는 것들, 만나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내가 그리 환대의 문제에 집착한 것은 어쩌면 스스로가 특정 공간들에서 환대받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텐데, 내가 움츠러들어 스스로를 가둬버렸다면 나는 결국 환대를 시험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자기검열 속에서 계속 나를 시험대에 올린 한 해였고 때로 괴로웠지만 그만큼 기쁜 순간도 많았다. 여전히 조심스럽다. 어떤 선택들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었는지 묻게 된다. 어떤 때는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도 자의식 과잉이다 싶다. 하지만 순간, 순간 타인에게서 느낀 무관심, 호의, 적극적인 환영, 그 모든 것들을 나는 하나의 표본 삼아 어떤 통약 가능한 언어를 제시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하여 환대가 반드시 일대일 관계에서 그대로 되돌아갈 필요는 없다는 점을 전제로, 다시 말해 내가 누군가에게 받은 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돌려줄 수만 있어도 된다는 의미에서, 적절한 정도의 무관심, 호의의 눈빛, 환영하는 자세, 기타 그 모든 것들을 되돌려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나 역시 그다지 섬세한 사람이 아니지만.

2024년 12월의 일기 중에서









2.


“동성애자들은 정신병자들이다”라는 문장에 대해 뭐라고 하면 좋을까?

  1. 소수자에 대한 혐오발언으로 신고 먹이기
  2. 정상적인 동성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읊으며 반박하기
  3. 동성애자 중에 정신병자가 많다는 점을 차분히 인정하기
  4. 기타

누군가는 해당 문장이 악의가 담긴 혐오발언이라며 즉각적인 반발심이 들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또 뭐 사실 그렇게 반박해야 마땅한 문장은 아닐지도 모른다. 가령 모범적인 시민으로 잘 사는 정상적인 동성애자들만을 부각시켜서 정신병자와 동성애자를 확고하게 분리시키려 한다면… 정신질환에 대한 낙인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뿐, 사실 주변을 둘러보면 솔직히 동성애자 중에 정신병자들이 많기는 하잖아요? 지금-여기에서 동성애를 하면서 정신이 조금도 안 아플 수도 있나? 당사자성 발언이라며 대충 눙치지 않기 위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렇다 치자. 그래서 뭐?(So what?)”의 정신으로 받아치는 것도 중요하다는 말이다.


인구통계학적 근거도 어설프게 대보자면 레즈비언 세상의 인류학자처럼 어플을 돌리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으니 사실 레즈비언 어플에서 그렇게나 ‘자기관리 잘 하시는 분’, ‘정신 건강하신 분’ 등을 찾아대는 이유는 해당 매물이 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신이 거기에 맞춰 내적·외적으로 자기 자신을 잘 단장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진심으로 당신의 행복을 빈다. 그러나 적어도 이 글에서만큼은, 나의 관심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있다. 나는 동성애자들이 너무 적극적으로 어떤 낙인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노력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백 살 먹은 레즈비언 할머니처럼 이야기하기…) 여기서 ‘퀴어queer’라는 말이 어떻게 의미를 되찾게 되었는지 굳이 길게 설명하진 않아도 될 것이다.

내가 여기서 매드 프라이드 비슷한 걸 외치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문제는 그것보다 좀더 복잡한 것 같다. 참고로 나는 적당히 사회생활하는 법 같은 걸 잘 몰라서 회사에서 ‘커밍아웃 중독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나의 퀴어됨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인데, 나의 오래된 정신병에게까지 스스로 그렇게 너그럽지는 못하다. 그래서 이 지면을 빌려 내 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나에게도 꽤나 이례적인 일이다. 일종의 ‘위험’을 무릅쓰고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

현재에 살짝 발을 걸쳤을 뿐 영혼은 어딘가 과거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이었던 시절이 길었다. 나는 오랫동안 과거에 대해 써왔고 늘 이제는 진짜 지금 내 앞에 도착해 있는 얼굴들에 대해 쓰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도무지 그럴 줄을 모르는 채로 강산이 바뀔 만한 세월을 보냈다. 작가들은 저마다 복수하기 위해서, 애도하기 위해서, 또는 기타 등등의 이유로 글을 쓴다고 하던데 나 역시도 복수와 애도 사이의 무엇을 하기 위해 글을 썼던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조증 삽화가 돌아올 때에는 어김없이 각설이처럼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내 인생에 깊게 또는 얕게 연루된 모든 사람들을 호출해냈다. 카톡이나 전화는 물론이고, 트위터나 페이스북, 인스타를 비롯한 SNS으로도. 마치 그들이 내 인생의 구원자였던 적이 있었던 것마냥, 그들이 내 인생에 마법처럼 재등장하는 것이 나를 새로이 구원할 방법이라도 되는 양 열심히도 찾아댔다. 막상 가까운 친구들에게는 다양한 욕설을 퍼부어대기도 했다.

이십대 초반, 핀란드에서 처음 조증 삽화가 발병되었다. 그때 처음 양극성정동장애 1형을 진단 받았다. 양극성정동장애에는 1형과 2형이 있으며, 둘은 상당히 다른 증상을 가지고 있다. 그때 핀란드행 비행기 표가 아직 남아있다.

나에게 별로 유리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왜 이 지면에서 꺼내느냐 하면, 내가 그러지 않고는 못 배기는 종류의 사람이기 때문이고, 또 그들 모두가 좋든 싫든 나라는 사람의 일부를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들 또는 심지어 그런 (조증기의) 경험들에 대한 언급 없이 나에 대해서 알맹이 있게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어렵다고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혜원은 내가 용기 있는 사람이라서 좋다고 했는데, 어떻게 보면 사실 그 ‘용기’가 극대화되는 기간은 조증기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삽화 기간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려는 시도 자체도 ‘용기 있음’으로 평가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용기 있는 게 항상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나’라는 말을 누구보다도 글에 많이 심는 사람이지만 그럴수록 더욱더, 오롯이 ‘나’만의 이야기라는 것이 성립할 수는 없다고 느껴왔다. 지금의 ‘나’가 있기까지 수없이 많은 ‘누군가’들이 나를 만들었다는 데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파트너와 더 바랄 것 없는 굳건한 관계를 맺고 있는 지금은 지나간 인연에 대한 생각이야 확연히 덜하게 되었지만 그런 — 나를 만든 것들에 대한 — 생각들 속에서 사로잡혀 있던 기간은 분명히 언젠가 나의 코어를 이루었다.

지금이 그렇게나 즐겁고 행복하다면서, 차라리 과거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고 닥치면 되지 않나, 라는 질문에 쉽게 긍정하지 못하겠는 것은 나의 쓰는 사람 정체성 중 고약한 부분일 테다. 내 인생에서 벌어진 많은 일들에 관하여 닥칠 수 있었더라면 인생이 지금보단 편했겠지. 하지만 기어코 닥칠 수 없다면, 나는 고민의 재료를 버리지 않은 채 이리저리 가공해보고 싶다. 사적인 관계로 작업하는 일의 곤란에 관해 명쾌한 해법이나 대안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자기만의 방으로 뒷걸음질 치기보다는 조심스레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그러한 한편으로 혹시 이 글의 일부가 일종의 반성문이 될 수도 있다면 조증기 안팎의 내가 꼴도 보기 싫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사람들 모두에게 용서를 빌고도 싶다. 내가 매드 프라이드를 쉽사리 주창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내가 미쳤다는 이유로 너무 많은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젠 누군지도 잘 모르겠는 과거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만 말하고 싶다, 고 누구보다 간절하게 생각한 건 역시 바로 나였다. 지긋지긋하다는 감각에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었던 것 역시 바로 나였다. 이렇게 실체조차 가물가물한 어떤 과거를 제 혼자 추억하다 늙어 죽는 건가? 하며 자포자기할 즈음… 거짓말처럼 혜원이 내 인생에 등장했다. 서로 안면이 있는 작가와 편집자 정도였던 우리는 퀴퍼에서도 만났고, 학술대회에서도 만났고, 인권 단체의 후원 행사에서도 만났다. 미리 약속하지 않고서도 6주 간이나 주말 스케줄이 겹쳐버린 것이다.

함께 아는 친구들이 있지만 처음에는 조금 어색하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매번 빠지지 않고 뒤풀이를 함께 한 덕에 우리는 한 주, 한 주 급격히 가까워졌다. 나로서는 서로에게 돌진하듯 혜원과 가까워지는 일이 무섭기도 했는데, 사실 혜원은 내가 지금껏 만난 사람 중에 제일 나에게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했지만 나로서는 그 관심을 보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여러모로 안전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좋은 동료가 될 수 있을 만한 사람을 또다시 잃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 혜원을 잃는다면 나는 그 ‘실책’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조심스러운 한편으로도 나는 도망치지 않았고 혜원과 가까워지기를 선택했다. 혜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기이한 인연이 우리를 맺어주지 않았다면, 숙제처럼 ‘The One’을 찾아 헤매던 나는 영혼의 일부가 상한 채로 한동안을 건너가야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소중한 친구들의 비호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외로움의 대가처럼 여겨왔고,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을 보면 반발심이 들었다. 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소울메이트’를 어찌나 찾아댔는지 대부분 알고 있다.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도 그러한 칭호를 수여하지 못하는 나의 깐깐함에 스스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런데 혜원을 만나자마자 너무나도 레즈비언의 전형에 해당하는 연애를 하면서 처음으로, 이 사람과 인생을 함께 한다면 그다지 외롭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또 내가 아는 혜원은, 그냥 멀리서 보기에도 시야가 넓었다. 그렇게 시야가 넓은 사람이 나를 선택했다는 사실 역시 자랑스러웠고(?) 기뻤다. 함께라면 많은 것을 공유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도, 하루도 떨어져 있지 않아도 늘 재미있었다.


3.


문제는 새로운 조증 삽화도 곧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천당을 맛보고 있는 것처럼 방심한 우리를 가만두지 못하고 지옥의 문이 열린 것처럼. 혜원은 사후에 내가 실은 자기를 좋아했던 게 아니라 그냥 조증이었을 뿐이었을까봐 무서웠다고 했다. 그게 아니라는 것은 내가 살면서 증명해 보이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 당시를 돌이켜보건대 내가 제일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혜원인 것 같다. 과거에 내가 누구를 좋아했고 어쩌고저쩌고 하는, 연인으로서 그다지 달갑지 않은 레퍼토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레즈비언들은 오프에 나가서도 다 첫사랑이니 전 애인이니 끝없이 말한다는 속설도 있지만. 하여간 그는 끝나지 않는 돌림 노래와도 같이 똑같은 소리를 거듭하는 나를 끝내 견뎠다.

게다가 나의 조증 삽화는 스스로가 ‘트루먼 쇼’ 속에 갇혀 있다는 ‘망상’을 동반하는데, 나 역시도 혜원이 연기자 중 하나라는 상상을 하면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상의 체계를 구체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쯤 조울증 십 년 차 베테랑으로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가장 가까운 파트너를 불신할 수밖에 없는 저주에 걸린 것처럼 굴었고 그렇지만 혜원과 함께 있는 것이 좋아서 연극 속에 갇혀 있어도 괜찮다고 말하곤 했다.

누군가와 연애를 하는 도중에 조증 삽화를 겪은 것이 처음이라, 그 기간을 건너가는 난이도가 우리 둘 모두에게 굉장히 높았던 것 같다. 연애한 지 몇 년 지난 사이도 아니고, 한 달쯤만에 겪을 만한 경험은 아니었던 것 같다. 혜원은 내가 그 시간을 건너 언제라도 ‘돌아올 것’이라는 점을 신뢰했을까? 모르겠다. 혜원은 내가 삽화 기간 동안 매일 매일 써준 글들과 편지들을 읽으며 시간을 견뎠다고 이후에 말해줬다. 그 당시 나는 신뢰를 잃을까 걱정하며 혜원의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도 편지를 썼다. 잘 알려져 있듯이 조증 삽화 기간은 예술적 영감이 솟는 기간이기도 해서 나의 진심을 달변가처럼 전달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는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의 삽화 기간 동안 혜원이 충분히 나를 떠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라는 상상을 하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혜원은 그 시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내가 단약을 했다는 사실에 너무 화가 났다고 했다. 이전에 조증 삽화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모르겠는데, 그런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또 단약을 했느냐는 질문에 나는 별다른 대답을 찾지 못했다. 정신병자 초짜였던 옛날 같았으면 나는 약 같은 것은 믿지 않는다느니, 내가 정신 수양을 제대로 하면 된다느니 하는 소리를 해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나는 그보다는 ‘그냥’ ‘어쩌다 보니’ 단약을 한 케이스였다. 한두 번 실수로 안 먹었다가 다시 먹을 타이밍을 놓친 케이스(?)랄까.

내가 대단히 反정신의학을 주창하는 사람은 아니었음에도, 사정상 더 자주 만나지 못하고 두어 달에 한 번 찾던 정신과 선생님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나는 정신과 선생님이 중년 남성이라는 이유로 나의 정신병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판단해왔고, 몇 번의 병동 입원을 거치면서 내가 그것을 거치게 한 주체로서의 가족과 정신과 선생님을 한 팀으로 불신해왔다. 그러한 상황이 있다 보니, ‘어쩌다 보니 단약’도 여러 번이면 ‘어쩌다 보니’라고 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이 글을 쓰면서 어찌 됐건 내가 참 무방비한 사람이었구나 싶은 생각이 이제 와서야 든다. 매순간 나는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내리면서 살아왔을 텐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꽤나 악수가 많았던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의 애인이자 친구이자 가족으로서 무책임했다고까지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여간 혜원과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는 조증 같은 걸 의심하지 않고 그냥 기분이 좋고 행복한 시기라고 믿었던 것 같다. 오히려, 나는 혹시나 약을 먹었다가 이 흐름을 끊어버리는 게 무서웠다. ‘지금 너무 좋은데, 왜?’ 왠지 모르게 영혼을 세신 중인 것 같았던 그 때의 그 느낌이 ‘증상’일 수도 있는 가능성을 나는 무시했던 것 같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 와중에 이제 와서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은, 내가 ‘망각의 달인’이라는 점이다. 기나긴 조증 삽화가 지나고 나서 혜원이 그 시기 나의 언행에 관해 언급할 때면 조마조마해졌는데, 나 스스로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이 꽤나 많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나는 삽화 기간에 오래된 친구에게 그저 안부 인사 정도를 했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혜원이 말해주길 그에게 내가 엄청 욕지거리를 했다고 한다. 그런 것들이 별로 나에게 유리한(?) 사실들이 아니어서 금방 잊어버렸던 걸까? 아니면 조증기의 어떤 기억들은 술을 엄청나게 많이 마시면 블랙아웃되는 것과 비슷한 메커니즘을 갖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남들도 다 이 정도는 잊어버리고 사나?


하기야 인생 전체에서 그 모든 기이한 언행을 스스로 생생하게 기억한다면 나는 지금껏 온전히 살아남을 수 없었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택하자면 ‘기억의 달인’이 되고 싶다고 말하고 다니지만, 그것은 사실 내가 망각의 달인이라는 점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기는 한다. 실은 삽화 기간으로부터 반 년 정도가 흐른 지금까지도 일하고, 쉬고, 떠들고, 놀면서도 문득문득 삽화 기간에 내가 했던 말과 행동이 떠올라 문득 얼굴이 화끈거리기는 한다. 그러나 그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을 안고도 어찌 잘 살아가는 수밖에는.

하여간 나는 당시 혜원이 나의 곁에 남기로 선택한 것이 내 인생에서 손에 꼽을 만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아직도 이렇게 부족한 나를 왜 그가 이렇게까지 사랑하는지 모르겠다는 클리셰적 물음표 속에 빠져 있다. 나를 불안하게 만들 줄 아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를 불안하게 만들 줄 알면서도 그러지 않기로 작정하는 것이 진짜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혜원을 만나며 느꼈다. 혜원은 신뢰가 무엇인지 말과 행동으로 늘 보여줬다. 그런데 이 행운이 그저 운으로 남지 않을 수도 있을까? 우리가 겪은 시간을 일반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은 최소한, “~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의 곁에 남는 일이 가능하다는 증거 하나쯤은 될 수 있을까. 다른 누구도 아닌 나와 혜원을 위한 증거라도 될 수 있다면, 이 글은 충분히 소임을 다했는지도 모른다.

























이심지 Simji



같은 계절을 두 번 쓰기 (2)

이어지는 두 번째 연재에서 이심지는 조증기의 경험들과 관계 맺는 일에 대해 쓴다. 이심지는 자신의 조울증 10년의 역사를 꺼내놓는다. 그 사이에는 사랑했던, 지금도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혜원이 있다.

이심지는 부끄럽고 꼴보기 싫은 기억들을 재료 삼아 과거에 머물러 있던 자신을 현재로 데려온다. 그리고 “지금 자신 앞에 도착해 있는 얼굴들”에 대해 쓴다.

“지금의 ‘나’가 있기까지 수없이 많은 ‘누군가’들이 나를 만들었다는 데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이심지에게 쓰기란 나의 병과 사랑하는 사람들, 그것들과 함께 잘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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